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환상이 위대할수록 생활도 위대하다
이효석은 식민지 현실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시대 현실과 연관된 구체적 일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꿈과 몽상, 예술과 사랑을 옹호하며, 진부한 일상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꿈꿀 권리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의 문학에 드러난 탐미성, 환상성 등은 이러한 문학의 꿈꿀 권리를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 이효석은 식민지 현실 너머를 동경했으며, 이를 통해 현실을 미학적인 것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미의식(낭만성·탐미성·환상성)으로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식민지 현실의 암울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대신, 식민지 현실을 풍요롭게 가꾸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을 섬세하게 부조했던 것이다. 이효석이 ‘서구의 텍스트’나 ‘꿈꿀 권리’를 통해 현실을 ‘재발견’했듯이, 우리도 그의 문학을 통해 일제 말의 현실을 ‘추체험’할 수 있는 셈이다.
그가 재구성하려 했던 자연과 도시(전통과 서구)의 이미지는 미적 충동(탐미성·환상성)으로 충만해 있다. 개인의 꿈꿀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 넘실거리는 욕망은,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견디게 한 힘으로 기능했기에 그만큼 소중하다. 고향과 직접적인 소통·교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적 가상’을 통해 이를 성취하려는 의지의 발현이었기 때문이다.
이효석의 문학은 인간의 근원적 속성인 꿈꿀 권리가 아름답게 직조되어 있는 한 편의 비단과도 같다. 그의 문학이 격변의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 문학이 소홀히 해온 결손 부분을 보충해 주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효석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긴장으로 직조된다. 그의 소설은 도시와 농촌을 배회하면서 이국적(낭만적) 취향과 향토적 정서가 혼융된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에서는 목가적 자연을 그리워하고 농촌에서는 도시를 꿈꾼다.
200자평
이효석의 문학은 일제 말 암울한 시대에도 한 개인의 꿈꿀 권리를 아름답게 직조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낭만적 서정과 세련된 기교’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낭만성, 탐미성, 환상성 등은 식민지 현실과 무관한 듯 보이나, 한편으로는 암울한 시대 현실에 대한 한 부표로도 읽을 수 있다.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문학의 운명’을 체현하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
가산(可山) 이효석은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돈>, <모밀꽃 필 무렵>, <산>, <들>, <분녀>, <개살구>, <향수> 등의 주옥같은 단편과, <낙엽을 태우면서>, <동해의 여인>, <고요한 ‘동’의 밤> 등의 수필, 그리고 장편 ≪화분≫, ≪벽한무한≫ 등을 남겼다.
초기에는 유진오, 채만식 등과 함께 ‘동반자 작가’의 경향을 띠었으나, 이후에는 김기림, 정지용 등과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구인회’ 결성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효석의 문학은 시적 서정을 소설의 세계로 승화함으로써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장면의 분위기를, 섬세한 디테일보다는 상징과 암시의 수법을 이용하는 그의 문체는 우리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밀꽃 필 무렵>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돈>, <분녀> 등의 작품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세계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性)과 결합시켜 서정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효석이 추구한 세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도시 문명과 대비되는 목가적 전원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상반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을 표출한 작품들이다. 이효석의 소설은 도시를 배경으로 하든, 농촌을 배경으로 하든 이러한 현실(일상)과 이상(꿈)의 긴장으로 직조된다. 그에게는 지옥과 같은 현실을 벗어날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엮은이
고인환은 1969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예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중앙일보≫ 신인 문학상 평론 부문에 <순정한 허구, 혹은 소설의 죽음과 부활-성석제론>을 통해 등단했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제7회 젊은평론가상(2006)을 받았다. 저서로 ≪결핍, 글쓰기의 기원≫(2003),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2005),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2003), ≪공감과 곤혹 사이≫(2007), ≪한국문학 속의 명장면 50선≫(2008), ≪작품으로 읽는 북한문학의 변화와 전망≫(공저, 2007), ≪메밀꽃 필 무렵≫(편저, 2001)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재미있고 알찬 글을 읽고 쓰기 위해 학생들과 고민하는 한편, 민족문학연구소, 남북문학예술연구회에서 근대문학, 북한 문학, 민족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차례
모밀꽃 필 무렵
돈(豚)
개살구
분녀(粉女)
동해(東海)의 여인(麗人)
영서(嶺西)의 기억(記憶)
고요한 ‘동’의 밤
낙엽(落葉)을 태우며
향수(鄕愁)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지러는 젔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히 흘니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녀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니며 콩 포기와 옥수수 닢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모밀밭이여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곰을 뿌린 듯이 흠읏한 달빛에 숨이 막켜하얗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모밀꽃 필 무렵>